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체념으로서의 자유에 대하여

체념으로서의 자유에 대하여 

1. <자유론>에서 제시된 자유의 원칙 
밀이 <자유론>을 집필한 당시는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과 프랑스의 2 월 혁명이 유럽 일대의 정치 체제에 충격을 주고 있을 때였다. 당시 유럽의 정부들은 교육과 재산이라는 정치 참여의 조건을 완화하고, 인민에게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를 실현해나가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서 유럽의 지적 엘리트들은 우아하게 숙의하며 진리로 고양해나간 공중 public’의 지위가 한순간에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이제 지배자를 주기적으로 선택하는 간접민주제가 정착해감에 따라 인민과 지배자의 일체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밀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공중은 자율적으로 숙고할 수 있는가. 그리고 확장된 공중의 이해는 화해될 수 있는가. 밀은 이 두 질문에 대한 회의주의적 답변으로서 <자유론>을 썼다. 다수의 무식자가 난입함에 따라 부르주아적 공론장의 지적 이상이 훼손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적 세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선 무능력한 공중에 대한 엘리트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곧 자기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로 정의되는 사회 내지 여론으로부터의 자유인 바, 하버마스가 말하는 것처럼 관용이라 번역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용은 나머지 사람들과 엘리트, 그리고 구성원들 간의 근본적 차이와 일치 불가능성을 전제하기에 체념적인 해법이다. 밀의 논지의 이러한 체념주의적 성격은 그의 사회 인식과 상대주의적 진리관에서 잘 드러난다

2.1. 괴물로서의 사회 
“’출판의 자유가 정부의 타락이나 전횡을 막아주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라는 사실을 굳이 강조해야 하던 때는 이미 지났다는 구절에서 보이듯, 밀에게 있어서 정부는 더 이상 공중에 의해 견제돼야 할 대상이 아니다.1 인민이 정부를 선출하기에 인민과의 질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러한 이상주의적 관점은 이제 전제정부 대신 사회라는 새로운 괴물을 등장시킨다. 여기서 다수내지는 여론과 동의어로 쓰이는 사회란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자기 이외의 나머지 사람들, 압도적인 숫자에서 나오는 구속력과 획일성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구속력은 자신은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터무니없는 믿음에서 나오며, 또 이를 재생산한다.

문제는 사회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확대된 공중이 동질적이고 저열한 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밥벌이를 잃는 것은 물론, 자칫하면 철창에 갇힐 수도있게 하는 사회의 파괴력이 자정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3 새로이 공론장으로 유입된 다수가 자신의 생각을 형성시키는 수단은 신문과 교육, 그리고 통신 수단인데, 이 역시 이미 존재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유통, 전승시키는 역할 밖에는 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생산된 다수 중 “100명 가운데 99명은 제대로 판단할 능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4 이러한 인식 위에 괴물로서의 사회상이 성립하며, 이는 사회를 구원할 외부적 요인, 어떤 메시아적 존재를 요청한다


2.2. 관용, 그리고 진리의 다발
그런데 밀의 사회 인식은 뒤이어 드러나는 그의 상대주의적 진리관과 모순된다앞서 그는 대중 매체에 의한 구성원들의 표준화-저열화를 비관한 바 있으나, 뒤이어 진리의 정도는 각자의 특수 이익이 실현, 반영됨으로써 증진된다고 주장한다. 밀의 진리관에 따르면, 수많은 이해당사자가 토론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각기 다른 진리의 편린을 쥐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판단할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일단 공론장에 진입한 확대된 공중은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한다. 이렇듯 수많은 특수 이익의 담지자들이 존재함에 따라, 합리적 이성으로부터 도출된 보편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해진다. 대신, 밀에게 있어 진리는 최대한 다양한 관점에 노출되고 안전하게 토론되어야만 최대의 효용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진리는 이성의 형식 내에서 보편적으로 찾아지는 대신, 구성원들의 특수 이익을 부분적으로나마 고려함으로써 그 누군가의 불만을 잠재우는 혹은 만족을 증진하는 역할을 떠안는다. 하버마스는 이를 독단적 잔류물이 억제될 수 있지만 이성의 공통분모로 환원될 수는 없기 때문에, 밀은 비판이 아니라 관용을 요구한다고 해석한다.

이렇듯 특수 이익이 물신화되고, 효용이 이성과 진리의 위상을 대체하면서 모든 주체의 이성으로부터 합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일반 이익은 부정된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진리관에 입각했을 때, <자유론>에서 용과 맞서 싸우는 기사 내지는 순교자로 묘사되는 엘리트가할수있는일이란특수이익의다발들을어떤종합적이해로전개시키는것이 아니라 이 다발에 균열을 내는 것, 혹은 다발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이 다발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견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영역이 조금이라도 침범받는다고 느끼면 자유의 훼손을 부르짖는다. 이렇듯 일반 이익 내지는 보편 진리의 불가지론을 전제한 밀의 자유론과 사회관을 극한으로 전개시키면 그 종착점에는 이성의 종합 없는 끝없는 이해의 대결장으로서의 사회가 있는 것이다

3. 결론 
밀의 <자유론>은 공중의 확대로 공론장의 배타성이 약해져 가는 가운데, 천재에게 보내는 찬가이자 향수라고 할 수 있다. 천재는 사회라는 괴물과 맞서 싸우는 순교자이며, 독약을 마신 소크라테스다. 그러나 천재와 노동자가 동일한 위치에서 동일한 참정권을 가지는 시대에, 이 싸움은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수량으로 진리와 권력이 환원되는 사회에 대해 천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발언권을 인정받는 것, /그녀에 대한 관용을 인준받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밀은 동시에 사회가 무수히 많은 익명의 이해당사자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들은 자기 이해에 기반한 토론을 통해 진리의 효용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사회를 그저 억제될 수 없는 특수이익들의 첨예한 대립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한다면, 사회 구성원들 간의 공론은 역사라는 시간축이 배제된 끝없는 개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 개량은 여론의 관용의 근거한 바, 규모와 폭이 어느 한도 이상 커지기 전에 억제될 수밖에 없다. 이렇듯 밀이 제시한 자유주의적 모델은 사회를 수많은 머리가 달린 감시자로 설정하고, 인간 행위의 지평을 관용의 경계를 넘지 않는 우리 자신에게만 관계된 것 self-regarding’, 혹은 특수 이익으로 축소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우리를 더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에 내재된 이 역설적 부자유는 개별성이란 신화 아래 우리 각자의 이해가 더 상위 범주의 이익으로 종합될 가능성을 애초부터 부정하는 것이다

J.S. Mill, <자유론>, 서병훈 역책세상, 2010, p. 43. 
Ibid., p.47.Ibid., p.69.Ibid., p.49. 
5 J. Habermas, <공론장의 구조변동>, 한승완 역, 나남, 2013,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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