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텔레비전 –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 서평

레이먼드 윌리엄즈의 <텔레비전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 서평

대중문화가 저급한 오락거리라는 의미로 통용되던 시기에 영국의 문화이론가 레이먼즈 윌리엄스가 쓴 <텔레비전>TV라는 매체에 대한 고전적 비평서로 자리잡았다. TV의 내용 형식에 대한 사회과학적 연구 방법도 정립되지 않았던 당시, 마셜 맥루언이 설파한 기술결정론적 매체 이론은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이 책은 기술이 사회의 독립변수라는 논지의 맥루언식 결정론을 논박함과 더불어, TV의 내용과 그 형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쓰였다. 그러나 이 두 목적은 다소 엉성한 서술 방식과 빈약한 자료에 말미암아 충분히 달성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1. 기술결정론에 대한 실패한 논박

먼저, 기술결정론에 반대한 윌리엄스의 사회결정론 내지 제도결정론은 이론적 어젠다로부터 도출된 경험적 분석의 전개가 빈약하며, 그 빈약성은 기술결정론적 서술의 구조를 요청한다. 윌리엄스는 매체 기술은 사회의 원인이자 효과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기술은 마치 독립적인 영역에서 개발되어 새로운 사회나 새로운 인간조건을 만들어내는 힘을 행사하는 듯이 해석하는 기술결정론적 시각을 비판한다(P.50). 그러나 <텔레비전> 1테크놀러지와 사회에선 이러한 주장을 배반하는 서술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간단히 이 부분의 내용을 언급하자면, (A) 1장의 2테크놀러지의 측면에서 본 텔레비전의 사회사에서 저자는 텔레비전의 발명을 가능케 한 기술 발명들의 전사를 살핀다. 여기서 전기, 전신술, 사진, 영화, 라디오와 같은 기술들의 개발사가 다뤄진다. (B) 저자는 3텔레비전 테크놀러지 사용의 사회사의 경우, 텔레비전 기술이 여러 가지 전문화된 형식들의 복합체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고 기술한다(p.61). TV의 발명 이전에 존재하던 신문, 사진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 새로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의 발달을 유도했던 새로운 필요성을 만들어냈기에 TV가 발명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P.61). 먼저 (A)(B)에 대해 총평하자면, 이 두 부분은 일종의 미디어 기술의 계보를 그린다는 점에서 프리드리히 키틀러, 제이 데이비드 볼터, 리처드 그루신과 같이 기술결정론자의 범주로 묶이는 학자들과 유사한 서술 구조를 보이고 있다.

먼저 (A)에선 TV의 전제가 되는 기술들 각각이 개발된 경위를 나열하고 있을 뿐이며, 이 각각의 경위 또한 특정한 개인이 특정한 품목을 개발했다는 식의 정보로 이뤄져있다. 이러한 단편적 정보들의 배경이 되는 사회학적 틀거리가 부재하기에, 이러한 서술 방식은 과학 기술 영역이 당대 사회적 조건으로부터 상당히 자율적인 원리로 작동, 전개된다는 식으로 읽힐 수 밖에 없다. 이는 대표적인 미디어학자 중 한 명인 키틀러가 그의 저서 <광학적 미디어>에서 채택한 서술 방식이기도 하다.   
   
(B)에서 저자는 기술의 발전이 사회 내 필요성과 이 필요성이 사회구성체 내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기술결정론을 논박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신문은 중앙집권화되는 국가에서 이전에 없었던 정보유통의 기능을 맡게 되었고, 사진은 시공간적 제약을 초월해 인지와 기록을 할 수 있게끔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윌리엄스는 신문과 사진의 발생을 각각 정치적 중대국면에서 나타난 결과(P.60)’사회적 요인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기술의 발명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 정치사회적 배경 서술에는 역사적 사건과 경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으며, 대신 저자는 중앙집권화’, ‘새로운 인간관계와 같이 추상적 원인을 요청한다.

특히 윌리엄즈의 말에 따르면 신문이나 영화 같은 기술은 사적이고 자기충족적, 그러면서도 외부로부터 일정한 지원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가정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요구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대의 상황에 대한 묘사로부터 의도와 같은 심리적 차원의 요인을 추적해들어가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고, 여기엔 수요의 담지자인 대중의 심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사적 근거가 없다. 이는 어떤 기술을 대중이 환영했다는 사실로부터 소급적으로 연역한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 원인에 의거한 주장은 저자 자신의 목적을 배반하고, 신문이나 사진과 같은 TV 이전의 매체 기술이 이러한 사회적 필요성을 창출했기에 TV의 발명이 가능했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B)에서 저자가 새로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테크놀러지의 발달을 유도했던 새로운 필요성으로서 당대 사회적 상황이 아닌 신문, 사진과 같은 개별 기술을 호명하는 점에서 그 혐의가 드러난다. 기술의 모태는 사회라고 주장은 하지만, 결국 방송은 여러 가지 전문화된 형식들의 복합체 속에서 탄생하게 된다(P.61)”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B)는 선행 기술로부터 새로운 매체가 탄생한 원인을 찾는 기술계보학적 논지로 읽힌다.

이렇듯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기술결정론에 대한 반박은 강력한 이론적 틀거리는 물론, 기술과 사회 간의 관계에 대한 실증적 분석이 결여됐기에 대안적 가설의 토대를 건실히 하는 데 실패했다. 더불어 그는 기술결정론의 설명 방식 기술이 기술을 결정한다 을 빌려오기까지 했다. 그가 <텔레비전>에서 제시한 의제에 따라 소위 맥루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선, 당대 사회의 대중들이 해당 기술의 탄생을 요구하고 있었다는 바가 증명되어야 한다. 또한 기술사적 맥락 뿐만 아니라 이를 포괄하는 정치, 사회적 맥락이 어떻게 기술 발명의 한계를 규정지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텔레비전>의 의제는 그가 비판한 맥루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저지하기 위한, 약간의 맑시즘적 터치가 가미된 또 다른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할 뿐이다.

2. ‘흐름이라는 분석 단위에 대한 인상 비평

저자의 기술결정론에 대한 반박에서 보였던 엉성함은 TV 의 매체 비평을 시도한 4편성: 배분과 흐름에서도 드러난다. 이 장의 두 번째 절인 연속 또는 흐름으로서의 프로그램 편성에서 저자는 매체 이용에 따른 전체적인 경험흐름을 분석 단위로 설정하나, 이러한 개념화의 근거와 구조화, 그리고 데이터 없이 곧바로 분석에 돌임함으로써 인상 비평에 머물렀다. 이론적 명제로부터 도출된 경험적 가설의 연구 디자인이 엄밀하지 못한 것이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흐름은 프로그램과 같이 개별적인 아이템이 아니라, “우리가 체득하고 있는 단절적 반응과 묘사의 어휘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흐름의 성질(P.151)”이다. 이는 한 채널에서 방송되고 있는 감각적 데이터의 총체이며, “개별적인 사건이 무엇이건 간에 의도적인 연속 안에 포함될 것으로 처음부터 계획, 따라서 전체적인 맥락이 개별적인 프로그램을 능가하는 단위다. 따라서 시청자에 의해 시청된 시간 내 방영된 모두가 분석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먼저 이 장의 키워드인 흐름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저자가 글을 쓴 당시와 지금, 어떤 채널에 대한 연속적 시청은 지배적인 시청 양식이었을까. 저자의 문제 의식은 시청자들이 사실 본인이 -  프로그램 단위로 TV를 시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했는데, <텔레비전>에서 이러한 문제 의식이 현실과 정합하는지의 여부는 분석되지 않았다. 만약 윌리엄스의 인상과는 별개로 시청자들이 개별 프로그램 단위로 시청한다면, 기존 연구와 전혀 다른 노선을 선택하게끔 하는 낯선분석단위를 설정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의문은, 윌리엄스 본인도 6대안적 테크놀러지, 대안적 사용?’에서 희망적으로 예견한 바와 같이 같은 내용을 더 다양한 채널로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뚜렷해지고 있다.    

두 번째 질문은 저자의 흐름의 관찰/분석은 편성의 의도, 시청의 반응을 과학적으로 포착했는가이다. 4장의 3흐름의 분석에서 저자는 미국과 영국의 채널들을 얼마나 세부적으로 관찰했느냐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눠 분석함으로써 방송의 형식과 이에 내재한 편성의 의도를 추론하고자 한다. 그런데 저자는 BBC2 채널과 KQED의 저녁방송 편성을 인용한 부분에선 의식적으로 특정 항목을 선택, 배열했다는 인상을 준다든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사이에 특정 주제의 뉴스를 끼워넣은 것이 특정 관심사를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 모든 서술의 근거는 저자의 인상이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채널-저자 바깥의 어떠한 사회적 사실도 없다. 윌리엄스는 자신이 느낀 의도적 배열의 인상을 자의적 기준에 따라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TV 수용자와의 인터뷰 혹은 편성담당자와의 대담과 같은 객관적 지표 없이, 레이먼즈 윌리엄스는 그저 무질서해보이는 편성의 패턴 속에서 그들의 반응과 의도를, 그리고 흐름의 본질을 추론해낼 뿐이다.     

3. 결론


            이렇듯 <텔레비전>은 서술 형식과 구조 이론적 명제와 경험적 가설의 부재 - 가 그것이 근거하는 논지 자체를 배반하는 좋은 예시가 되었다. ‘텔레비전 시대에 맥루언 식 기술결정론과 맞선 저서로서, 저자는 a. 논지만이 우아하게 짜여진 선언문 혹은 b. 기술사와 사회사가 풍요로이 교접하는 미시사적 연구 서적 둘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다. 이렇듯 서술의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린 데에는 윌리엄스가 기존의 방법은 물론, 전통적 맑시즘의 경제결정론으로부터 탈피한 관점을 제시하려고 한 이중의 모험을 감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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