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나에게 미디어란 무엇인가?

나에게 미디어란 무엇인가?

1. 미디어의 정의

미디어란 무엇인가? 일차적으로 미디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정보를 저장, 처리, 나아가 전송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도구다. 나아가 표준화된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집적되며 인간과 매체 간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일관된 경향성을 만들어내는 인공 환경까지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예술 현상과는 달리, 문자의 탄생 이래로 미디어가 만들어지는 원리에선 표준이 강조되며 이는 인간의 신체 능력에 대한 은유로 작동한다. 더불어 미디어가 제공하는 이 은유에 따라 지각과 같은 신체 능력이 재배치된다. 여기서 미디어 테크놀로지를 인간 신체 능력의 은유로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체를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우리의 몸과 감각이 미디어로 외재화되어야만 비로소 이에 대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Kitler, 2011). 라캉의 거울이론에 등장하는 아이처럼 우리는 미디어를 경유해 우리의 신체상을 형성한다.

이렇듯 테크놀로지적 표준이 지각 과정 등 신체 능력에 대한 은유를 제공하고 이에 따라 신체를 전반적으로 재배치한다고 전제했을 때, 미디어는 인간적 능력의 확장물이 아닌 신체 바깥으로부터 침투하는 독립 변수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미디어라는 독립 변수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제작되는 것 같지만, 오늘날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하이테크 미디어들은  기능성과 같은 전통적 필요성과 무관한 미적 논리, 자율적 논리에 따라 생성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제 하에서 인간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미디어 테크놀로지에 의해 재편되기만을 기다리는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가? 사뭇 무질서해 보이는 인류 역사로부터 기술에 의한 인간의 피정복이라는 패턴을 찾을 수 있지만 더불어 인간에 의한 기술의 발명과 전유라는 패턴 또한 분명 찾을 수 있기에, 전술한 것처럼 인간을 마냥 비참하고 유약한 한낱 객체로 설정하는 것은 무언가 적절해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다소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한 합리적인 답, 오늘날 미디어가 인간의 위상에 대해 새로이 정립한 관계를 알기 위해선 먼저 테크놀로지결정론과 사회결정론의 대결로 요약될 수 있는 매체론의 전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2. 매체론의 전사: 맥루언 vs. 윌리엄스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마셜 맥루언)’, ‘테크놀로지가 테크놀로지와 인간을 결정한다(프리드리히 키틀러)’, ‘테크놀로지는 사회 내 필요에 의해 비로소 등장한다(레이먼즈 윌리엄스)’, ‘(TV 테크놀로지가 불러들인) 실시간 원격-객관성은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이 가진 생명력을 박탈시켰다(폴 비릴리오)’… 

지금껏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이론가들이 설파한 바들을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인간 사회 간의 관계성이란 키워드로 추상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이항대립쌍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 어떤 요인을 독립 변수로 승격시킬 것인가의 여부를 가지고 이론들을 두 개의 범주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맥루언 식의 테크놀로지결정론이 있다. 이는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논리 하에 작동하며 사회의 변동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후자는 레이먼즈 윌리엄스 식의 사회결정론(혹은 좀 더 전통적인 용어로는 사회구성체론)으로서, 이는 테크놀로지를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하위 범주들 중 하나로 간주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필요에 따라 테크놀로지가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술한 두 개의 범주들 각각은 서로 다른 이론적 공백을 지니는데, 전자의 경우 (a). 테크놀로지 계보학을 보면 분명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논리의 존재, 그리고 그것과 사회 변동 간의 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며, (b).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사용자인 인간으로부터 주체성을 박탈함으로써 인간을 한낱 기술의 객체로 자리매김 해버리는 문제가 있다. 후자는 테크놀로지 발생의 원인을 새로운 인간관계’, ‘중앙집권화’, ‘필요와 같은 추상적인, 심지어는 심리학적인 요소로 환원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전자의 (a)에는 테크놀로지를 이미 존재하는 자명한 그 무언가처럼(따라서 테크놀로지의 탄생 이후 사후적으로 인문학적 메스를 들이대면 설명이 완료되는 것처럼), 혹은 기술종사자들이 보기엔 어불성설에 다름 아닌 어떤 신비한 요인이 테크놀로지의 탄생을 결정짓는 것처럼 기술하는 경우가 해당된다. 그 대표적인 예시인 맥루언은 예언적이면서 현란한 어조로 테크놀로지가 인간 사회에 끼치는 변동의 내용을 서술하지만, 동시에 프리드리히 키틀러가 비판한 것처럼 신체로부터 기술을 사유(Kitler, 2011)”하려 하며 그렇기에 마치 군사적 에스컬레이션 전략 모델처럼 전개되는 기술혁신은 어쩌면 기술들이 서로 말 걸고 답하는 과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은폐한다(Kitler, 2011). 이러한 전략은 테크놀로지 자체가 아닌 지각’, ‘신체와 같은 인문과학적 렌즈를 거쳐 테크놀로지를 바라본 결과로, 기술자들도 납득할 만한 테크놀로지의 계보 내의 논리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테크놀로지 계보학을 촘촘하게 직조해나가는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의 경우,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범주 내부에서의 자기 완결적 설명엔 성공한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했는지 기술하는 덴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편 (b)에 대해서는 인간과 테크놀로지 간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인간의 위상을 지나치게 낮게 잡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테크놀로지가 고유한 논리 체계 하에서 자율적으로 작동한다고 전제했을 때 인간은 이에 대한 개입 여지를 박탈당하고 재편되기만을 기다리는 유약한 물질로 전락한다.  

맥루언 식의 테크놀로지결정론을 논박하기 위해 등장한 윌리엄스 식의 사회결정론은 테크놀로지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을 부정하고 이를 사회 내 하나의 범주로 편입시킨다. 사회라는 상위 카테고리와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강조하며, 윌리엄스는 테크놀로지 발생의 연원으로서 당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대중의 필요를 지목한다. 그런데 그의 저서 <텔레비전론>에는 이 연원과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발명 사이의 간극에 대한 문헌사적 설명이 부재한 바, 그는 중앙집권화’, ‘새로운 인간관계와 같은 추상적 원인에 근거가 빈약한 책임을 돌린다. 게다가 그가 제시한 또 다른 원인은 대중의 필요인데, 윌리엄스는 그것이 매체 계보에 있어서 이전에 위치한 미디어에 의해 정초한다고 말한다. 이는 신문이나 사진과 같은 TV 이전의 매체 기술이 새로운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을 창출했기에 TV의 발명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윌리엄스는 기술이 사회의 모태 속에서 출현했다고 주장하면서도 테크놀로지의 계보 속에서 발명의 원인을 찾는다는 점에서 기술결정론을 논박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배반했다고 말할 수 있다.

3. 하이테크네와 포스트 휴먼  

앞서 살펴본 것처럼 전통적인 맥루언 식의 테크놀로지결정론과 윌리엄스 식의 사회결정론 양자 모두 각기 다른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결함은 테크놀로지와 사회 이항대립쌍 중 어느 하나를 무리하게 독립 변수로 설정하는 데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식의 무한 루프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선 오늘날의 매체 환경에 동기화된 인간과 기술 간의 새로운 관계성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R.L. 러츠키의 저서 <하이테크네>는 인간과 기술 간의 관계성 탐색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여기서 그는 오늘날 테크놀로지의 성격과 위상은 모더니즘 시기의 그것과 분명한 단절이 있으며 이는 곧 포스트휴먼의 새로운 윤리학을 정초할 필요성을 던져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테크놀로지의 개념적 본질로 소급해간다. 러츠키는 모더니즘 시기의 도구적 합리성 중심의 테크놀로지 개념이 미적 과정 및 운동으로서의 하이테크로 변모했다고 주장하며, 그 원인으로서 하이데거가 테크놀로지의 본질로서 언급한 탈은폐(Entbergung)’에 주목한다. 탈은폐는좀 더 시적인 방식의 재현이나 생산”이사물들을 계속해서 안정된 맥락이나 고정된 재현에서 해방시키고, 대신에 진행형의 과정이나 운동의 일부로 재현”하는 것을 말한다(Rutsky, 2004). 여기서 하이데거는 통념적으로 테크네의 본질적 기능으로 인식되고 있는 도구성과 더불어 전혀 도구적이지 않은 미적 생산(포이에시스) 또한 테크놀로지가 수행하는 본질적 기능으로 본다. 즉 인간은 도구로서의 기술을 통해 자연 환경에 틀을 씌우고 정렬, 배치(은폐)하지만 이 미적 생산으로서의 기술을 통해 세계를 불안정화시키고 하나의 운동으로 만들며 재배치(탈은폐)’하기도 하는 것이다. 러츠키가 사상사적 비약을 감수하면서 주장하길 테크놀로지의 두 번째 본질인 이러한 탈은폐적, 미적 기능은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과 함께 테크놀로지의 복제 가능성이 급격히 높아지면서 증폭된다. 먼저 아우라라 불리는 전근대적 미 관념을 은폐하던 주술성이 복제 테크놀로지에 의해 탈은폐화된다. 이에 따라 칸트적 의미에서 주체의 정신이 투사된 신성한 전체로서 여겨지던 취미 판단의 대상들은 본래의 현존, 의미에서 자유로워진 텅빈 기표들로 분해된다. 예컨대 ‘Tumblr’ 서비스에 업로드되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미술 작품들과 이에 대한 2차 창작물을 보면, ‘작품이란 범인이 손을 대선 안될 무엇이란 낭만주의적 관념은 해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향이 가속화됨에 따라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바우하우스적 명제는 부정되고 기능성은 곧 기능적으로 보이는 것’, 재현의 문제로 바뀌게 된다. 이제 테크네의 도구적 본질이 미적 본질에 의해 역전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예컨대 최근에 출시되는 하이테크 미디어들의 하드웨어 디자인을 살펴보면 상호 복제를 거쳐 어떤 경향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도구적 기능성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 하에서 설계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소비자 또한 하이테크 미디어가 지닌 도구적 유용성 대신 악세서리로서의 미적 가치를 우선시한다. 소프트웨어 또한 마찬가지다. ‘Openprocessing’과 같은 오픈 소스 사이트에 들어가 조금만 살펴봐도 순수히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진, 그리고 다른 오픈 소스의 복제 및 개선을 통해 만들어진 수많은 프랑켄슈타인적 코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러츠키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상호 복제가 임계치를 넘으면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하나의 복잡계가 형성된다고 본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양자를 포함한 하이테크 미디어는 더 이상 인간이 통제 가능한 성질인 도구성이 아닌 탈은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예술-문화적 소용돌이로 변모했다. 지수함수적 규모로 서로를 재매개하는 요소들로 이뤄진 이러한 복잡계는 그 외부로부터 전체로서 조망될 수 없기에 이를 구성하는 하이테크 미디어는 더 이상 통제 가능한 도구적 대상이 아닌 불가해한 타자로서, 주체의 위상을 본격적으로 위협하는 자율적 생태계로 자리매김한다. 이 말은 즉슨, 인간이 미디어에 의한 전례 없는 규모의 지각적 구조 변동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수리적 본질을 궤뚫고 착취할 줄 아는 당당한 모더니즘적 주체의 위상까지 하이테크적 타자에 의해 빼앗길 존재론적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2015Youtube Music Awards를 수상한 팝 아티스트  Charlie XCX의 뮤직비디오 <Famous>는 하이테크 미디어의 문화적 형식이 기존의 신체상, 자아상, 놀이 문화 등을 재규정하는 방식을 미국 틴에이저 하위 문화의 코드를 빌려 재현한다.   

그런데 여기서인간이 이상 지배와 통제의 측면에서 인간이라는 유일 주체로 정의될 상황은 곧 오늘날의 매체 환경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관을 주창할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Rutsky, 2004) 이러한 가능성으로부터 테크놀로지 전체를 지배하려는 불가능한 기획을 도모하는 모더니스트 대신, 벗어날 수 없는 복잡계 내에서의 서브 코드 정도는 변경시킬 수 있는 하이테크 시대의 포스트 휴먼이 도래한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지 않으며 스크린에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리는 뉴-타입 휴먼들은 누군가의 눈에는 더 이상 진정한 관객이라 할 수 없는 인간(Virilio, 2008)”이겠지만, 이들은 편재한 커뮤니케이션 채널에 신경 감응한 새로운 신체를 지닌 채 모더니즘적 인간이 보거나 해내지 못한 무언가를 유희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는 어쩌면 도구 앞에 군림하는 대신 그것을 가지고 놀기로 한 이들이 새로운 유사 자연에 가장 잘 적응한 인종, 하이테크적 타자와의 협응적 관계성을 창출해낸 전례 없는 인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예술사에서 특정 장르의 가장 뛰어난 작품을 창조하는 예술가는 그 장르를 발명한 세대가 아니라 그 장르와 함께 성장한 첫 세대에서 나온다는 앨런 케이의 말이 작금의 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다면, 포스트 휴먼의 활약상은 이제 곧 시작할 참인 것이다(박해천, 2009).


<참고문헌>

박해천(2008). <인터페이스 연대기>. 서울: 디자인플럭스.

Kitler, F(2011). <광학적 미디어>. 서울: 현실문화.

Rutsky, R, L(2004). <하이테크네>. 서울: 시공사.

Virilio, P(2008). <시각 저 끝 너머의 예술>. 서울: 열화당.

Willilams, R(1996). <텔레비전론: 테크놀러지와 문화형식>. 서울: 현대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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