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신체로의 하강 혹은 귀환
0. 서론
가상현실을 통해 육화된 나me는 현실 내에서 매체를 이용하는
나I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가상현실 인터페이스가 신체와 결부되는 방식을 살펴보는 동시에, 다른 매체가 나I와 나me의 관계를 규정하는 방식을 비교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어떤 매체의 영향력은 다른 양식이 신체 감각에 끼치는 효과와 차이를 가짐으로써 문제성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쓰기’라는
전통적 커뮤니케이션 양식의 참여자가 스스로를 육화시키는 방식에 대해 살펴본
다음, 이러한 방식에 대척점에 위치하는 가상현실 시스템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이를 통해 육화의 주체와 대상 간의 동일시 정도가 매체의 이용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1. ‘쓰는 나’, ‘쓰여지는 나’를 바라보다
자신의 삶을 선형적 내러티브 구조로 평면화시켜 저술할 수 있다는 문학적 믿음은 18세기에 형성된 산물이다.[1]
그러나 로버트 엘바즈는 이러한 믿음에 대해 “언어는 말하는
주체의
이념에
따른 ‘기능’으로
정의되고, 현실이라는 것도 그 주체의 창조물로 간주되며, 진실이란
언어를
통해
만들어질
뿐이고
객관적인
형태로
확인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2]
주체의 이념과 언어라는 두 개의 매질을 거쳐 생산된 ‘쓰여진 나’라는 것은 ‘쓰는 나’와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바즈가 말한 매개물들은 ‘쓰기’라는 커뮤니케이션 인터페이스와 활동 위에서 성립될 수 밖에 없다. 본고에서는
먼저 이러한 물질적 기초 위에서 각각 언술 주체와 대상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 ‘쓰는 나’와 ‘쓰여지는 나’의 분리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글에서건 작가는 펜과 종이, 워드프로세서
등을 통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구현해내야 한다. 그것은 ‘세계’와 ‘나’다. 이를 위해 ‘쓰는 나’는
시각, 청각, 촉각 등의 감각 정보로 이루어진 현실세계 내
경험을 언어라는 기호로 번역한다. 그런데 세계 내 경험의 번역은 곧 ‘쓰는
나’의 이념을 통해 여과된 그/그녀만의 세계를 새로 써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쓰여지는 나’가 위치할 내러티브 구조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그/그녀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텅 빈 백지 내지는
워드프로세서의 빈 화면 뿐이다.
‘쓰는 나’의 세계를 번역해내는 과정에서 필요한 감각의
범주는 단순화된다. 언어를 써내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감각 기관은 활자를 보기 위한 시각과 펜과 키보드를
조작하는 데서 느껴지는 촉각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신, 이러한
최소한의 인터페이스와 감각 수용 기관의 연계는 작가/독자의 심상 이미지를 발생시키도록 유도한다. ‘쓰는 나’와 독자가 바라보는 활자들은 이미지를 현전시킬 수 없지만
그들의 사고 과정에 의거해 실제보다 더 복잡한 정보를 마음 속에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쓰기 인터페이스의 물리적 단순성은 ‘쓰는 나’로 하여금 그/그녀의 경험 세계를 추상화시키도록 요구한다. 이 과정은 실로 불편하고 어떤 정도의 물리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경험을
활자라는 감각 정보로 치환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세계와 나를 새로운 층위로 번역하는 활동이기에 지연 없이without
delay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작가는 백지와 창작 간의 물리적 간극 위에서 골똘히
생각한다. ‘창작의 고통’이라는 표현,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인간’과
근대적 예술가의 원형적 이미지 간의 상관성 등은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쓰는 나’와 ‘쓰여지는 나’ 사이에는
선명한 경계선이 그어진다. 경험 세계의 ‘나’를 끄집어올려 문학이란 가상의 영역 위에 올려놓기 위한 불편한 작업은 ‘쓰여지는
나’, ‘쓰여지는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검열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쓰는 나’는 초월적이고 정신적으로 고양된 데카르트적 주체의 지위를 점하게 된다. 경험을
글자로 옮기기 직전마다 ‘쓰는 나’는 고민한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나’는
‘쓰는 나’와 분리되며 한갓 대상이자 통제해야 할 사물로
전락한다.
이렇듯 ‘쓰여지는 나’는
작가 내면의 판옵티콘 내에서 주조된 가공물이다. 이렇게 ‘나’의 이원론, 언술 주체와 언술 대상 간의 부정할 수 없는 분리가 이루어진다. 이 분리는 해부해야 하는 카데바cadaver로서의 신체 모델을 설정하는
동시에, ‘주체’라는 이름의 외과의가 자연 – 자기 자신의 신체를 포함한 - 을 지배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그러나 ‘쓰기’가 가능케
한 신체의 지배는 오직 상징계적 차원에 한정되는 까닭에, 신체라는 이름의 실재는 사진에 의해 포착되기
전까지 베일에 가려질 수 밖에 없었다.
2. 가상현실과 신체로서의 참여자
앞서 살펴봤다시피, ‘쓰기’라는 행위의 참여자는 스스로를 ‘쓰는 나’와 ‘쓰여지는 나’로 구분한다. 그리고 쓰기의 언술 주체와 대상 간의 거리는 이데아계와 감각세계의 간극만큼이나 크다. 이러한 간극을 유발시키는 인쇄 기술 중심의 매체 환경 위에서 근대 문명이 발생한 바, 근대인의 자기 인식은 이러한 초월적 언술 주체와 동일시됐다. 그런데
컴퓨터 기술의 탄생과 발전에 말미암아 육화시키는 나와 육화된 나(에이전트) 사이의 거리는 획기적으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가상현실 내에서 육화된
나는 현실의 나와 감각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컴퓨팅 기술을 통해 구현된 가상현실 시스템은 이용자를 이미 성립된 그/그녀의 에이전트와 내러티브의 내부로 초대한다. 참여자가 해야 하는
작업은 가상현실 시스템을 감각 정보로 디스플레이하는 기기를 착용하고 조작하는 것 뿐이다. 착용된 기기를
거쳐 참여자의 감각 기관으로 흘러들어오는 정보는 경험 세계의 인지를 위해 필요한 정보와 이미 닮아있기에, 참여자에
의해 ‘번역’될 필요가 없다. 쓰기 행위와 달리, 스스로를 육화시키기 위해 경험 세계의 정보를
추상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쓰기’의
언술 주체가 정신적으로 몰입해야 한 반면, 가상현실의 ‘나’는 감각적으로 몰입한다. 그런데 가상현실의 ‘나’의 몰입감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현실의
설계자에 의해 설정된다. 활자로 채워지길 기다리는 백지와 달리, 다양한
감각 기관을 자극하는 오브젝트들로 꽉 찬 가상 세계는 참여자에게 최대한 여과 없이 전달된다. 가능한
높은 몰입감을 부여하는 것이 설계자의 목적이기에 가상 세계의 조작부, 즉 인터페이스는 최소한의 이질감만을
허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참여하는 나’에
의한 감각 범주의 추상화 과정이 필요치 않고, 가상현실 내 오브젝트들과의 상호작용에는 시간적 지연이
없기에 ‘참여하는 나’는 에이전트와 쉽게 동일시할 수 있다. 쓰기의 언술 주체와 대상 간의 거리감을 가상현실의 참여자와 에이전트 사이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 게임에 열중한 자신을 떠올려보라. 자신의 에이전트가 다른 객체에
의해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을 때,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거리지 않는가? 이는 가상현실의 참여자에게는 육화의 과정 그 자체를 사고하고 검열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을 뿐더러, 육화의 ‘과정’ 자체가
이미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상현실이라는 매체 환경 내에선 메타적이지 않은, 반대로
(신체 중심으로) 일원적이고 즉물적인 ‘참여하는 나’가 성립된다. 리얼리티의
신체와 감각 정보로 변환된 컴퓨팅 시그널에 불과한 에이전트는 감각 기관 – 인터페이스 간의 결합 관계를
통해, 그리고 그 관계의 이음새를 감추는 시스템의 정교함을 통해 같은 층위에 놓이게 된다.
3. 결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쓰기’라는 행위는 ‘쓰는 나’와
‘쓰여지는 나’ 간의 자아 분리를 일으키는 동시에 ‘쓰는 나’를 메타적 입지에 설정한다.
작가가 동일시하는 이 ‘쓰는 나’는 신체를 포함하는
자연을 해부해야 하는 객체로 설정함으로써 스스로를 비신체적이고 정신적인 하나의 시선으로 고양시킨다. 반면
가상현실 시스템에 참여하는 행위에는 쓰기 행위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터페이스가 유발하는 불편함이 수반하지 않으므로,
에이전트에 대한 유저의 신체적 동일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가상현실에 참여하는 ‘나’는 감각하며 고로 자신이 존재함을 인지할 수 있다.
매체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도식은 “인간은 기술적
표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키틀러의 전언을 어느 정도 전제하고 있다.[3]
이는 컴퓨팅 시스템이 이미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산된 지금, 근대의 여명을 배경으로 글을
쓰던 계몽주의자들과는 전혀 다른 신체 감각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로써 인간은 정신이란
날개를 잃고 추락한 것인가, 혹은 비로소 자신이 본래 위치하던 신체라는 공간으로 복귀하는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양자택일형 질문에 대한 답은 현재를 과거로 파악할 후대의 역사가만이 제시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유호식, “자기에 대한 글쓰기 연구 (2)”, <불어불문학연구> vol.86, 2011.
F. Kitler, “The World of the Symbolic-A World
of the Machine”, <<Literature, media, information systems>>, G+P Arts Int.,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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