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공론의 종언과 축척(縮尺)의 문제에 대하여

공론의 종언과 축척(縮尺)의 문제에 대하여   


            대상에 대한 관찰과 그로부터 도출된 이론은 투명하고 객관타당한 지식을 담보하는가관찰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녀의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만들어진 관찰자의 사회상prior image of society 등등 이론에 선재한 조건들은 그것의 뉘앙스, 방향, 심지어는 내용까지 다소 결정짓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외부 요인이 존재하기에 모든 조건으로부터 통제된 실험은 이상에 불과하다. 인간과 역사를 다루는 사회과학의 경우 이러한 애로사항은 증폭될 수 밖에 없다. 관찰자가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따라서 통제하기 힘든 이러한 조건들 중에는 대상을 얼마만큼 멀리서 바라보느냐의 문제도 포함된다. 조금은 결이 다른 예화지만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는 소인국의 피부가 백옥처럼 매끄러운 반면, 거인국의 피부는 우둘투둘하며 서로 다른 색깔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표현이 등장한다. ‘인간이라는 같은 대상이라도 스케일에 따라 얻어낸 지식이 다른 것이다. 나는 이 예화에서 드러나는 스케일의 문제, 혹은 관찰자와 대상 간 거리의 문제를 지도를 만드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 축척이 관찰의 내용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여기 말과 말의 제도의 탄생을 다룬 두 권의 책이 있다. 바로 위르겐 하버마스의 <공론장의 구조변동>과 조지 허버트 미드의 <정신, 자아, 사회>이다. 공통적으로 말하는 인간의 출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두 책은 관찰자가 설정한 축척에 따라 완전히 다른 논리가 도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버마스는 공론이 설 자리를 잃은 현실을 비판하는 반면, 미드는 인간 정신과 문명은 말에 의거한다고 낙관에 찬 목소리로 역설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서로 다른 역사적 조건과 축척에 근거해 체계적으로 쌓아올려진 두 책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각자의 논지로 서로를 외재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상 세계에 대한 조망의 거리를 기준 삼아 두 책의 논지를 병렬하는 것만으로 각자의 이론이 지닌 지리학적 맹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선 먼저 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부르주아 공론장öffentlichkeit’이라는 독특한 영역이 근대에 발생하게 된 조건과 그것이 붕괴해간 과정을 중범위에서 추적한다. 그의 지도에는 서구의 세 국가 - 프랑스, 독일, 영국 만이 포함되며 이러한 범위 내에서 관찰한 내용이 일반화된다.

그가 바라본 인간, 즉 사적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할 줄 알며 주제가 무엇이든 담론을 펼칠 수 있었던 부르주아-발화자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탄생과 궤를 같이 한다. 거시적으로는 대규모의 해외 무역과 신문 매체의 발달, 그리고 중상주의적인 민족국가의 탄생, 미시적으로는 부르주아적 프라이버시를 발달시킨 핵가족 구조의 개발과 함께 특유한 근대적 영역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영역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살롱, 커피하우스 등으로 분화된 바로 이 영역에서 부르주아들은 인간인 동시에 소유자였던 자신의 이해를 주제로 다른 이들과 자유롭게 토론한다.

이러한 공론장의 초기 형태가 문예적 공론장이다. 궁정의 문화적 기능이 도시로 이양되면서,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문화 상품의 형태로 유통되는 소설, 공연, 전시에 대해 자유롭게 비평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문예적 공론장 내에서의 토론은 다음과 같은 경향을 보였다. a. 지위 전체를 도외시하는 사회적 교제가 요구되며 그것이 이념화된다. b. 문화 영역이 성립하고 세속화(상업화)된다. c. 문화적 재화를 소유할 수 있는 대공중 내부는 비폐쇄적이다. 먼저 살롱, 커피하우스 등 서로 다른 이름이 붙여진 공론장에서는 신분에 따른 서열 의식이 부재한 단순히 인간적인동등성이 강조됐다. 이에 따라 의견과 논증의 권위가 방어, 관철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파트롱patron을 대체한 출판가에 의해 교회나 궁정의 과시적 공공성에 복무하던 문화적 재화는 공공에게 접근 가능한 정보로 전화된다. 마지막으로 이 문화적 재화를 소유할 수 있는 공중은 공중 일반의 화자, 교육자로서 스스로를 설정할 수 있게 된다. 즉 여기서 재산과 교양을 갖춘 누구나문예에 대해 판단할 권리를 갖는다. 이러한 문예적 공론장은 차츰 국가 권력이라는 공적 영역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는 정치적 공론장으로 전화해나간다. 바로 이 영역에서 공중public, 신문, 정당, 의회가 공식적으로 연계되며 시장은 국가 감독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이어서 이러한 공론장의 성립을 가능케 했던 토대인 소상품 경제모델로서의 자유주의 모델이 사회화된 국가(신중상주의)’, ‘국가화된 사회(대기업)’가 상호침투하는 독점자본주의가 대두하면서 붕괴된다고 말한다. 더불어 고독한 사적 독서와 담론의 교환이 가능했던 핵가족적 친밀성의 건축적 구조 또한 공동성의 물신에 굴복(번역본 p.300)”함에 따라 소멸한다. 이렇게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사회 특유의 국가로부터 자율적이면서도 날카로웠던 지적 토론을 지난 시대의 유물이자 인간의 규범으로 승격시킨다. 말하는 인간의 탄생과 종언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축적이 관찰에 관여한다는 명제를 상기시키자면, 이는 서구에 국한된 얘기일 뿐만 아니라 몇백년 안되는 짧은 시기를 하나의 완결된 국면,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설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저자의 태도는 분명 노스탤지어이며, 이는 언어가 이를 응집시키고 대체하는 매체에 의해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비관과 향수에 가득 찬 관점에선 이제 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할 능력이 없고, 말할 공간도 없으며 말할 주제와 말할 상대 또한 없다. 이렇게 말은 사멸한다.    

하버마스가 공론과 말의 제도의 탄생을 중간 축적의 시선으로 조망해냈다면, 조지 허버트 미드는 열기구의 시선과 현미경의 시선을 경유하며 말하는 인간과 사회의 탄생을 바라본다. 진화론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대에 활동했던 그는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론에 진화론을 도입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의 관찰 범위는 말이라는 것이 탄생한 직후부터 근세까지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넓은 범위의 관찰을 하나의 원리로 묶는 기제가 심리학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중추신경계와 의식, 그리고 행동을 넘나들며 미드는 생존이라는 목적이 말을 발생시켰으며, 다시 그러한 과정이 인간의 정신과 사회를 주조해냈다고 주장한다.

이를 경험적으로 규명해내기 위해 어린 아이를 관찰하는 미드는 어린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의 상황에 주목한다. 다른 개체와의 관계 속에 놓여진 인간 개체는 그/그녀와의 상호 작용을 개시하는 제스처를 내보이고, 이 제스처는 다시 그/그녀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자극-반응의 연쇄가 제스처의 대화conversation of gestures’이다. 그런데 서로 다른 유기체 간의 소통이 성공하기 위해선 다른 개체의 반응을 예지적으로 내면에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개체는 스스로를 타인의 입장에 놓기 시작한다. 제스처의 대화를 통해 이 과정이 반복되면 의미 있는 상징significant symbol’으로서의 언어가 발생한다. 음성 제스처로서의 언어는 발화자가 자신이 발화한 바를 들을 수 있다는 바로 그 특성 때문에 타인의 반응을 자신에게 정확히 지시할 수 있게 해준다. 미드는 언어를 통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의 정신이 출현한다고 말한다. 즉 개인 범주에서 사회 범주에 이르는 내면화된 타인의 태도와 교섭할 수 있고 그 교섭의 결과를 타인에게 성공적으로 지시하여 환경을 통제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능력은 다름 아닌 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은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 기제로 작동한다. 미드는 이러한 기제가 정치적으로 표현된 결과가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타인과의 동일시를 근본적으로 한계 짓는 중세적 카스트 사회와 구별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이가 서로의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사회가 정신에 내재된 사회적 자아로서의 인간은 이렇게 소통의 제한이 없는 담론의 우주universe of discourse’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분명 진보하며 인간 또한 그 진화된 사회에 맞춰 정신과 자아를 재구성하게 된다.   

미드의 사상은 독립 혁명 이후의 미국 사회를 모태로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낙관적인데 권력이라는 변수가 전제, 설명되지 않은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의 모델에 따르면 공론은 인간의 종적 특성이며, 소통의 양과 규모는 인간 사회의 발전과 정비례한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식 낙관주의를 단순히 나이브한 청사진 정도로 치부하기 전에 그의 조감도를 유심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인간의 종적 특성 자체를 소통으로 넓게 규정하고 관찰함으로써 하버마스가 포착하지 못한 맹점을 바라본 셈이다. 즉 미드는 그것이 비록 지구의 상공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낮은 해상도의 영상으로 인류사를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공론장이라는 특수하고 역사적인 영역이 발생하기 전에도 말은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다윈의 세례를 받은 미드 식의 종의 역사는 바로 그러한 시간의 두께 때문에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일본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사사키 아타루는 횡행하던 ‘~의 종언들에 대해 네 살 된 남자아이가 찾아와 이제 끝났다고 말한다(p.265)”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인류의 장구한 역사에 빗대어볼 때 종말의 선언은 너무 성급하다는 것이다. 좀 더 조밀한 시선에서 보자면 어느 역사적 국면은 정말 끝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면phase’에 불과하며 국면의 종말에 대한 선언은 그것이 만들어지게 된 특유한 축척에 근거한다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인간에 대한 다양한 축척도의 지도들이 개발되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서만 말하는 인간이라는 특별한 종에 대한 가장 진실된 관찰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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