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가상현실과 자아의 재창안 과정

가상현실과 자아의 재창안 과정

1. 그레고르 잠자와 자아의 원천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 그가 스스로를 벌레로서 발견하게 된 계기는 등의 감각이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하고 딱딱한 등을 대고 벌렁 누워있다가 곧 자신의 갈색의 불룩한 배와 목도한다.[1] 그 다음은 수많은 다리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를 벌레로 여기게 된 계기는 자기 신체에 대한 감각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이었다. 잠자가 다니는 직장의 지배인은 그를 보자마자 도망쳤으며, 어머니는 기절할 듯이 깜짝 놀라고 만 것이다. 더군다나 아버지는 마치 괴물을 쫓듯이 자신의 아들을 위협한다. 벌레로 변한 자신의 신체를 감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태를 합리적으로 해명하려고 한 잠자는 그렇게 자신을 진짜 벌레로 여기기 시작한다.

자아의 발생론적 시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작품의 교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은 이라는 감각 기관으로 대표되는 신체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아self 내지는 자의식self-consciousness의 발생은 신체의 작용을 전제하지만, 여기에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더 고급한 절차를 밟아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2.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이러한 ‘(개별적 유기체에서부터 사회적 조직에 이르는) 타인과의 상징적 상호작용을 통한 자아의 발생이라는 심리학적 관점은 미국의 조지 허버트 미드에 의해 전개됐다. 그에 따르면, 어떤 유기체의 자아가 발생되기 위해선 먼저 개별자들이 공통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이 있어야 한다. 이 의미는 다른 유기체의 행동에 대한 반응이 중첩되고 유형화되어 자신의 말, 행위에 일정한 통제가 가해짐으로써 결정된다. 이렇듯 공통의 의미가 부여된 상징이 공유됨에 따라 타인으로 가정되는 존재에 대한 일련의 조직화된 반응이 내면화된다.

그러나 자아는 개별 유기체 간의 소통을 통해 결정화되지 않는다. 자아의 발생은 사회적 조직 전체에 대한 일반화가 이루어져야만 완성된다. , A라는 특정 개인이 처한 공동체의 일반적인 반응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자아의 필수 요소인 일반화된 타인generalized other’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개인은 이를 위해서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조직이라는 다소 추상화된 개별자들의 집합을 경험해봐야 하며, 자신의 행동과 이 집합의 반응을 계속해서 견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인간은 언어를 매개로 자기 자신과 대화할 수 있으며(자기 반추self-reflection), 이는 자아가 (스스로를 대상화시키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는) 신체와 별개로 작동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렇듯 허버트의 자아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칸트식으로 선험적으로 규정된 정신이 아니라 사회적 행동상징적 상호작용 - 에서 찾는다는 점, 그렇기에 자아의 많은 부분을 경험에 따라 주조되는 사물로 본다는 점에서 가상현실 시스템의 수용이 자아의 변용에 끼칠 영향에 대한 통찰을 가져다준다. 이는 매체 이용자의 자아가 완성됐는지의 여부에 따라 두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3. 가상현실과 자아

먼저 자아가 이미 완성된 개인이 가상현실에 참여할 경우, 즉 이용자가 리얼리티 내의 사회적 구조를 일반화시켜 내면화할 경우 특정 조건을 전제한 가상현실 시스템은 자아를 안전하게 분화시킬 것이다. 미드적 관점에서 이 조건은 다음과 같다: ‘를 대변하는 에이전트, 이 에이전트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타인의 존재, 타인()과 이용자가 공유하는 공통된 의미 체계와 상징. 만약 리얼리티에서 이용자가 사용하던 언어 체계가 그대로 가상현실 시스템에 적용됐다면 이 특수한 환경에서의 경험은 빠르게 흡수될 것이다. 예를 들어 MMORPG의 참여자들은, 개발자가 리얼리티의 논리를 적용시킨 가상의 서사 세계 내의 다른 개체들과 여러 방식으로 소통하며, 점차 에이전트(게임 캐릭터)를 자기 자아의 하위 구조로서 계발한다. ‘me’라는 통일된 자아상의 한 브랜치branch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가상현실 내에서 형성된 자아의 하위구조는 리얼리티 내에서 재생산된다. 아무리 게임 접속 시간이 길어도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이머가 드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경우는 꽤나 문제적이다. 비록 다음과 같은 가정은 이윤 창출의 효율성 원리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우는 개체가 경험하는 가상현실 내의 의미, 상징 체계가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가정한다.

먼저 가상현실의 수용자가 리얼리티 내에서 계발된 완전한 자아를 지닐지라도, 가상현실 내에서 통용되는 상징과 그 의미가 리얼리티에서와 다르다면 통일된 자아상에 균열이 갈 수 있다. 이는 하나의 신체에 다중의 자아가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정신분열적 상태와 연결된다. 반면 앞서 설명한 첫 번째 사례는 수용자의 몰입을 위해 리얼리티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경우이므로, 이미 확정된 자아의 이미지가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자아의 필수 조건인 일반화된 타인은 다른 사람들의 개별적 태도 뿐만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조직, 공동체의 태도를 내면화한 산물이다. 그런데 가상현실 내에서 통용되는 상징의 양상이 다르다면, 개인이 가정하는 타인 - 개별자 차원에서 사회 조직에 이르는 - 의 태도 역시 달라질 것이다. 예를 들어 리얼리티에서 말하는 화폐가 전혀 다른 쓰임새를 갖는 가상현실의 경우를 가정해보자. 현실과 반대로,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포틀래치란 현상과 같이, 베풀면 베풀수록 그 가치가 늘어나는 것을 화폐라 칭하는 가상의 상황에 처하면 어떨까. 가상현실의 참여자는 그 상황에서의 생존을 위하여 여타의 개체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화폐의 의미를 정의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 부여는 화폐의 통용이라는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따라서 기존에 성립된 공동체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자아상에 개입하게 된다.

가상현실이 어떤 정신병리학적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이러한 방식일 것이다. 많은 보수적인 미디어 연구자들이 우려하는 게임 중독의 폐해도 이러한 정신분열적 논리의 연장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과장 내지는 가상현실의 인식론/존재론/윤리적 잠재력에 대한 과소평가에 지나지 않는다. 먼저 앞서 언급했다시피 다중의 게이머들의 높은 몰입도를 요구하는 게임 컨텐츠들은 리얼리티에 반하는 현실 논리를 갖출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 논리와 어긋나는 사회적 법칙이 통용되는 컨텐츠는 공중을 몰입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낯선컨텐츠들은 일찍이 시장에서 외면받을 확률이 굉장히 높기에, 자본을 갖춘 가상현실 개발자들은 많은 자원을 투자하면서 굳이 이러한 모험을 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장에서 유통되는 대다수의 게임 컨텐츠들은 리얼리티에서 성립된 자아를 안전하게 분화시켜주기만 할 뿐, 교란시키지 않는다.

또한, 자아의 분열은 새로운 인식론/존재론/윤리학의 가능성을 지시할 수도 있다. 어떤 가상현실을 경험함에 따라, 개인은 어떤 다른 의미가 통용되는 세계 속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고, 그러한 상황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자기 의식을 형성할 수 있다. 이렇듯 이러한 분열된 자기 의식에 말미암아, 개인은 리얼리티에서의 행동 양식에 대한 재인식을 할 수 있다. 이는 본래의 윤리에 대한 각성과 더불어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정신적 자원이 된다. 개발 환경의 한계에 말미암아 가상현실의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들이 골고루 부족하긴 하지만 시리어스 게임의 범주 안에 놓일 수 있는 몇몇 인디게임들은 이러한 기능을 수행해낸다.      

4. 결론

지금까지 가상현실이 정신에 작용하는 두 가지 방식을 조지 허버트 미드의 자아론에 근거해 살펴보았다. 자아의 형성에 있어 미드의 이론이 신체대신 커뮤니케이션에 주목하는 바, 가상현실 내에서 어떤 양상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느냐에 따라 개인의 자아상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성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논증에서 중요한 발견은, 가상현실의 작용에 있어서 어떤 새로운 신체적 경험 낯선 시각 영상 내지는 음향 등 보다는 참여자와 다른 개체들 간의 관계가 더 결정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로서 인식 내지 오인하게 만드는 기제는 신체의 테두리 바깥에 있다.    

자기 재인식 내지 오인으로 이어지는 가상현실의 작용은 다시 자아의 하위구조의 분화 또는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본고가 주목하는 자아 분열의 효과는 기존의 인식론/존재론/윤리학의 전복과 관련이 있다. 타자와의 부대낌 가운데 리얼리티와의 차이를 직접 경험하는 것은 새로운 자아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미디어 연구자가 주목 혹은 경계해야 하는 지점은 기존의 자아를 재생산하는 주류 게임 산업의 폐해가 아니라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조지 허버트 미드, <<정신, 자아, 사회>>, 나은영 역, 한길사, 2010.

프란츠 카프카, <<변신>>, 곽복록 역, 중앙출판사, 1992.






[1]프란츠 카프카, <변신>, <<변신>>, 곽복록 역, 중앙출판사, 1992,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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